며칠 전, 10년 넘게 써오던 멤브레인 키보드에 마시다 만 물잔을 엎지르고 말았다. 그 바람에, ‘키보드에 물을 엎질렀더니 이 모양이 되었다.’라고 타자하면 ‘ㅣ혿프에 ㅠㅜ렁프러 얼프지러러쑏러니 이 호양이 ㄷ횡러쑈다.’라고 적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타자기까지 포함하자면 자판을 써 온 지 20년이 넘었으나 이런 실수를 저지른 건 처음이기도 하고 오래 다루어 온 기기인 터라 다소 애석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으나, 이내 “이 참에 메캐니컬 키보드나 하나 더 들이자.”하고 혼자 신이 나 있었다.
집에서 스탠드에 랩탑 얹어 두고 사용할 때 쓰려고 들였던 레오폴드의 FC750R 텐키리스 키보드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았기에 이번에도 레오폴드 제품을 우선으로 고려해 살펴보니 104키 말고 98키가 새로 출시돼 있었다. 사실 104키에는 텐키리스와 달리 여백을 채우느라 로고가 들어가 있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텐키리스는 데스크탑용으로는 키가 부족하다 싶었던 차에 양쪽의 아쉬움을 해결해 주는 98키 FC980M이 나와 단번에 내 마음을 그리로 기울게 했다.
다음으로 어떤 색상을 선택할는지도 고민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바로 검은색으로 골랐을 텐데, 요새 들어 테이블 분위기가 너무 칙칙한 게 아닌가 싶던 차여서 흰색으로 정하고 주요 키들을 원색 키캡들로 꾸미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마련한 모습.
대개 남는 건 사진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남는 건 글이라 여긴다. 그만큼 글쓰기를 중히 생각함에도 올해는 ‘시각’에 투고도 하지 않고 그 외의 글쓰는 일들을 최대한 기피하며 지냈다. 몇 년 간 작문에 들였던 시간과 고생이 몹시 컸던 까닭이다. 물론 대단찮은 글이고 분량도 미천했으나 그 정도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스스로를 몰아부치지 않고 쉬고 싶었고, 마냥 넉넉히 쉬었다. 기실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지만, 다 차서 넘쳤던 쉼이 물잔을 엎지르고 새 키보드를 들이게 한 게 아닐까 하고 억지부려 본다.
글이 쓰고 싶어졌다.